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경기도

여주에서 세종대왕 영릉과 효종대왕 영릉 관람하며 유익한 여행

by 올리버 2018. 7. 22.



작년 추석연휴, 여주에 위치한 세종대왕 영릉과 효종대왕릉에 다녀왔다. 명절 연휴라서 가족 단위로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우리 역시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여주가 생각보다 그리 먼 곳은 아니지만 일부러 찾아오게 되는 장소는 아니라는 점에서 이날의 방문은 여러모로 뜻깊은 시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한글날 문화제를 알리는 현수막 역시 흥미로웠다. 





원래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데, 이날은 명절 연휴를 기념해서 무료관람을 즐길 수 있어 이 또한 좋았다. 이로 인해 명절을 맞아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며 관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라는 짐작도 해보게 됐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족들과 역사적 명소를 찾게 되는 일이 줄어드는데, 이럴 때 함께 걸으며 주위 풍경과 더불어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과거와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게 되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세종대왕 영릉을 만나기에 앞서, 입장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야외에 복원을 통해 설치한 여러가지 기구들이었다. 세종대왕이 발명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을 준 천문 관측기기 및 해시계 등을 오랜만에 볼 수 있어 좋았다.



사진 속 현주일구는 세종 19년인 1437년에 창제된 해시계로, 세종 당시에는 휴대용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크기 역시 손바닥만 했으나 전시를 위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의 7배를 확대해 복원한 것이라고 하니 참고하면 되겠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생김새가 흥미로웠다. 




조선시대 천문관측대로 간의대 혹은 첨성대로 불렸던 관천대는 하늘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의 관측을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부 불타버렸기에 숙종 14년인 1688년에 다시 2개를 제작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사진 속의 관측대라고 한다. 보물 제 851호로 창경궁 소재의 관측대를 본떠 제작한 것이라고. 


관측대의 중심에 자리잡은 것은 적도의로써 편리하고 손쉬운 관측을 위해 고안된 천문기기다. 현존하는 유물이 남아 있지 않는 관계로 남병길의 저서 '성경' 속 그림을 바탕으로 복원해냈다. 


천체를 측정하기 위해 세워진 기기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를 통하여 관측을 해내는 방법 역시 예사롭지 않게 느껴져서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던 한때였다. 





이렇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봐도 경이로움을 마주할 수 있었던 세종대왕 동상의 모습 역시 한눈에 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푸르름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만나는 역사의 위대함이 곳곳에서 펼쳐졌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훈민문을 지나면 사진과 같은 연못이 나온다. 연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었는데, 녹음으로 채워진 공간 속에서 여유를 만끽하며 쉼을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뿐만 아니라 연못 안에서 헤엄치는 잉어들의 모습을 만나보는 것도 가능했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현왕후를 합장한 능으로 위엄을 전했다. 훈민정음 창제를 포함한 다양한 업적은 물론이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왕. 


그 깊은 심성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겠으나 한글을 쓰고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전하며 잊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싶다. 그런 의미에서 소중한 우리의 한글을 올바로 사용하며 살아야겠다 다짐했다. 





능의 정면에 상의 형태로 배치된 돌은 혼유석으로 영혼이 나와 쉴 수 있게 설치된 돌이며, 하나의 봉분 앞에 나란히 위치한 두 개의 혼유석은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합장릉임을 알려준다. 


혼유석 앞쪽에 세워진 장명등은 왕릉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등의 의미를 지녔다. 





영릉의 왼쪽과 오른쪽 사이드에 촛대처럼 길쭉하게 자리잡은 한 쌍의 망주석은 혼이 자신의 유택을 찾고자 할 때 이용하는 것이며, 문인을 나타내는 문인석 뒤쪽의 석마는 조선 왕릉 고유 형식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조각상이라고 한다.


석양과 석호의 모습 역시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존재하니 방문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다.    




무인석은 조금 더 앞쪽에 조각돼 영릉을 지키는 표정과 무장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교한 갑옷을 갖춰 입고 있어 이로 인한 위엄 또한 돋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대왕 영릉에 이어 효종대왕 영릉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의 연지는 복원공사인 관게로 영릉길 이용이 불가능해 왕의숲길을 걸어서 다녀왔다. 


효종대왕 영릉을 위해 거쳐야 하는 것은 홍살문이었다. 능, 묘, 원, 관아, 궁전 등의 앞에 세우는 붉은 색으로 칠해진 나무문으로 높이가 엄청났다. 붉은색으로 칠한 기둥과 상부에 화상모양의 나무살을 설치함으로써 붙여진 것이 홍살문이란 이름이라고. 



악귀를 물리치는 붉은색과 나쁜 액운을 화살 혹은 삼지창으로 공격한다는 의미가 상징적으로 발휘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고개를 들고 우러러 바라볼만 했다. 홍살문 가운데는 삼지창이나 태극 문양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효종대왕 영릉의 홍살문의 중심에는 태극 문양이 존재함으로써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정자각 내부>



<예감>


위에 선보인 두 장의 사진은, 홍살문을 지나 오면 눈에 띄는 정자각 내부와 예감을 촬영한 것이다. 이중에서도 예감은 정자각 뒷편 서쪽에 존재하는 사각형의 석함으로써 제사가 끝난 뒤에 철상하면서 축문을 태워 묻은 공간이라는 설명이 호기심을 자아냈다.


참고로 철상은, 제사 음식을 치우는 것을 뜻한다.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의 왼편으로는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수라간, 오른쪽으로는 제기 보관 및 능을 지키는 관리와 관노가 머무르는 수복방과 비각이 위치해 있었다. 





효종대왕 영릉을 만나기 전,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세종대왕 영릉과 같은 쌍실능(합장릉)이 아니라 왕과 왕비의 무덤을 위아래로 위치시킨 동원상하릉인 것이 눈에 띄었다. 조선왕릉 중 최초의 동원상하릉 형태를 갖춘 것이라고.  


인선왕후릉에는 곡장(능의 양옆과 뒤를 둥글게 감싸도록 두른 낮은 담장)이 없었다.  






곡장은 효종대왕 영릉에만 존재했다. 그리고 합장릉이 아니라 혼유석은 한 개만 눈에 들어왔다. 봉림 대군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 제 17대 왕인 효종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당시에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 3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한 소현 세자를 대신해 왕권을 물려 받게 된 것이다.


볼모 생활의 원한을 해소하고자 북벌론 주장에 앞섰던 효종. 그러나 북벌의 꿈을 결국 이루지 못한 데다가 8년의 볼모생활을 포함해 힘든 시간을 보냈던 만큼 승하한 후에라도 평안히 지내라는 기원을 담아 '편안할 영(녕)'자를 넣어 영릉(寧陵)으로 명명되었단다.



더불어 세종대왕 영릉(英陵)은 세종대왕의 빼어난 업적을 기리고자 '꽃부리 영'을 썼다는 점도 알아두면 도움이 되겠다.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지만, 효종대왕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경우에 여주를 찾아 세종대왕 영릉과 효종대왕 영릉을 관람한다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더 깊이 쌓을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생각보다 알찼던 여주에서의 반나절이 이렇게 흘러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된 조선왕릉의 장엄함을 마주함과 동시에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든 왕들의 업적까지 맞닥뜨릴 수 있는 기회를 그런 의미에서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무더운 여름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찾아오는 명절 연휴에 가족들과 함께 방문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댓글